여섯개의 눈 

[인터뷰] 야지마 츠카사(YAJIMA Tsukasa)

1. As a photographer, artist, or activist, please introduce yourself and your activities. 


YAJIMA Tsukasa, photographer

Born in Takasaki in Japan in 1971

Studied history in Waseda University

Contract photographer for Asahi Shinbun between 1997 and 1999

Lived and worked at House of Sharing in Korea for a photographic project about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between 2003 and 2006

Lived and worked in Berlin, Germany between 2006 and 2019 as freelance photographer and journalist

Living and working in Korea since 2019

website: www.tsukasa-yajima.com


야지마 츠카사, 사진작가

1971년 일본 다카사키 출생 와세다대학에서 역사 전공.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아사히 신문의 전속 사진작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군 성노예제 사진 프로젝트를 위해 한국 나눔의 집에서 근무. 2006년부터 2019년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프리랜서 사진작가 및 저널리스트로 일하면서 작업을 이어왔다.

2019년부터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홈페이지: www.tsukasa-yajima.com


2. As neighboring countries, Korea and Japan share a history of colonialism as victims and perpetrators and are experiencing sharp conflicts in their revisionist view of history. You are Japanese, but I know you have volunteered as an activist at the House of Sharing in Korea for a long time. You also participated in several exhibitions and activities about comfort women in Germany and Korea. You show different thoughts and actions than most Japanese. What experiences or triggers led you to become an activist/photographer? What captured your heart so intensely that you continue to do it to this day?


Backing to my school days, I met foreign students from Asian countries, including Korea, in the university in Tokyo. We used to talk about and discuss histories in Asia together, modern history of the region specially, which brought me big chances to learn and consider the relationships in the past and future between us based on history. I spent most of my vacation visiting historical sites to learn and see directly the things happened under the colonization of Japan and during the WWII and what influences the history was leaving between us in the region. Learning feminism thoughts and its movements also showed me a way to the issue of the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MSSJ) when I was a student back then. Through these experiences I started to wander if I could do something in terms of the settlement of the history in Asia. Therefore, the MSSJ turned one of the most important issue and subject of my photographic works later as a Japanese, a man and a photographer. 


 저는 와세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온 유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함께 아시아의 역사, 특히 이 지역의 근현대사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는 역사를 바탕으로 우리의 과거와 미래의 관계를 배우고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휴가를 사적지를 방문하여 일제 식민지 시대 영향 아래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동안 일어난 일들과 역사가 이 지역에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남기고 있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면서 보냈습니다. 내가 학생시절 페미니즘 사상과 운동을 알게 된 것도 일본에 의한 군성노예(MSSJ)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보여주었어요.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아시아 역사의 정착이라는 측면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방황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MSSJ는 훗날 일본인, 한 남자, 사진가로서 내 사진 작업의 가장 중요한 이슈이자 주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3. You have spent a long time with the victims and documented them in photos to publicize the issue of comfort women. More than anything, it looks more prominent as an activist. What was your focus when you first started taking pictures? What was your direction when you first started taking photographs? Or have your thoughts changed since then? What, if any, triggered those changes? 


 The photography project “MSSJ” at the House of Haring launched in 2003 on a full-scale operation while I was living with 8 to 11 survivors together there. Actually, I had taken photos of them one year before in 2002 but it was just a short stay as two weeks. At the first phase of shooting, I started to photographed their daily activities. Because its was very impressive for me to see the survivors in their daily lives. They had nothing to do with the history of the MSSJ, except joining the Wednesday demonstration or giving testimonies in front of visitors to the house, for example. Officially they shared pains, grieves and traumatic experiences caused by the MSSJ during the WWII while they were living in the shelter, but they were also individuals at the same time like we are. They had different opinions and ways of lives of their own. It was very natural for them NOT TO SHARE these things with others. They also needed to keep the most important matters only in themselves. I was excited and confused whenever I saw their unmasked faces but learnt that they were also humans as we are and they didn’t always need to share whatever they had in hands with others. However, I considered endlessly, specially, when I developed photographs in a dark room, somehow, what the survivors whom I was photographing meant to me mostly. Or what I could do through my photography for them. Was photographing their daily activities enough as a photographer who was given an opportunity to live with them in a house? So, to give clearer meaning(s) to my photo works, I started to take portrait photos of them mostly. The moment we come face to face with one of these survivors frozen within a portrait, she stares back at us. The portrait photograph comes alive to become a device that connects us to the survivor. The uniform angle and framing of each shot symbolizes the shared experience of these survivors as victims of the MSSJ. However, the survivors that appear in the photographs before us are unquestionably individuals, each with their own name and identity, who have had their rights trampled on by the patriarchal society in which we continue to live; and now these single human beings demand the restoration of their dignity. In the portraits, these individuals step forward and question our relationship to them. “In what way, you should keep us in your memory?” In other words, I hope the portrait photos of them can be a bridge connecting us to the survivors to consider again the relationships between us and the ways of remembrance.

 

 2003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눔의 집 사진 프로젝트 ‘MSSJ'는 내가 그곳의 8~11명의 생존자 할머니들과 함께 생활하던 중 시작되었습니다. 1년 전인 2002년에도 사진을 찍긴 했지만 당시는 2주 정도의 짧은 체류에 그쳤습니다. 촬영 첫 단계에서는 그들의 일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생존자 할머니들의 일상을 보는 일 자체가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할머니들이 수요 시위에 참여하거나 나눔의 집에 온 방문객들 앞에서 증언하는 것 외에는 할머니들의 일상은 MSSJ의 역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2차대전 당시 보위부대에 의해 위안소에서 지내며 겪은 고통과 비애, 트라우마를 공유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와 별반 다를바 없는 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 각자의 생각과 삶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할머니들이 이러한 개인적인 면모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가장 중요한 일들을 그들 자신에게만 간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들의 맨낯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흥미롭고 혼란스러웠지만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손에 든 모든 것을 남과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는 내가 촬영하고 있는 생존자들이 대체로 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끝없이 생각했습니다. 또는 그들을 위해 제가 사진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요. 그들과 함께 집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사진작가로서 그들의 일상적인 활동을 사진으로 찍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 사진 작품에 좀 더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주로 인물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초상 사진 안에 고정된 희생자 할머니들 중 한 사람과 대면하는 순간, 그녀는 우리를 응시합니다. 인물 사진은 살아나 생존자와 우리를 이어주는 장치가 됩니다. 각 샷은 균일한 각도와 프레임을 이루는데 이러한 방식은 MSSJ의 희생자로서 이 생존자들의 공유된 경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사진에 등장하는 생존자들은 틀림없이 저마다의 이름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졌지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가부장적 사회에 짓밟힌 개인들임을 환기시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각각의 단일한 인간들은 그들의 존엄성 회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초상사진에서 이 개별자들은 앞으로 걸어나와 그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질문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대는 기억 속에 우리를 간직해야 합니까?” 다시 말해서 저는 이들 초상사진이 우리와 생존자들을 잇는 다리가 되어 우리와의 관계와 기억의 방식을 다시 고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Photography materializes the artist’s gaze on the subject. Your black and white photos are the first to notice the plain and uncomplicated composition. Also, the grandmas in the pictures are conscious of the photographer and pose finely and neatly, as if they were taking photos at a local studio. This approach also avoids the photographer’s interpretation and narrative on the subject. What kind of life and figures did you pay attention to take pictures of the grandmas as your subjects?사진이란 피사체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물성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사진이 타자, 즉 관객과 조우하고요. 이번에 전시하는 선생님 흑백 사진들은 단순한 구도가 특징이라고 여겨집니다. 할머니들은 동네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듯 단정하게 단장한 자세를 취하고 계세요. 이러한 접근은 사진가의 해석과 서사를 지워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인 할머니들의 어떤 삶과 모습을 담으려고 주의하셨나요? 


 Please refer the answer to your 3rd question. I had only 2 regulations when I photographed them in portraits. 1: They can decide where they want to be photographed. Actually, they chose a place within their daily live spaces mostly. 2: They don’t have to be dressed up specially only for the shooting. Because “coming face to face with survivors at the scene of their daily lives” was a part of the concepts of the project. 

 3번째 질문에 대한 제 답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할머니들의 인물 사진을 찍을 때 딱 2가지 규정이 있었어요. 1: 할머니들이 사진을 찍고 싶은 곳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주로 일상 생활 공간 내에서 장소를 선택했습니다. 2: 촬영을 위해서 특별히 차려입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생존자들의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대면하는 것’이 프로젝트 콘셉트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5. The main keyword of the exhibition is the ‘daily life’ of the survivors. We stop by the local bakery to buy some bread for breakfast. We call these things the trivial round of daily life that is mundane and ordinary. Everyday life seems a day that repeats run-of-the-mill routines and sometimes is considered dull and prosaic. Such a plain ‘daily life’ was impossible for those who went through the Pacific War. In particular, most women forced as sexual slaves by the Japanese army gave up on returning to their hometowns. Given that their destroyed daily life was almost impossible to recover, the keyword’ everyday life’ paradoxically implies the importance of daily life. Through this exhibition, how do you want the audience to feel the victim’s past and today’s daily life? 

 전시 <여섯 개의 눈>의 키워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상’입니다. 우리는 동네 빵집에 들러 아침에 커피와 함께 먹을 빵을 사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이런 일을 우리는 일상이라고 부릅니다. 일상이란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하루고 때로 지루하다고도 여겨지죠. 이런 당연한 ‘일상’이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했어요. 특히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에서 군대의 위안부로 끌려갔던 대다수의 분들은 고향에 돌아오기를 포기했고요. 그들의 파괴된 일상 자체가 거의 회복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일상’이라는 키워드는 역설적으로 일상의 중요성을 함축할 수밖에 없는데요. 선생님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싶으신가요? 


 The image of the damage is not monolithic. The survivors appearing in my photo woks had also daily lives. Even after the WWII in China even though they had no chance to return to their home towns in Korea. As the term of Korean Diaspora defines, in the process of (forced)settlement in a foreign lands they had started to live another daily lives through finding ways to survive in the regions as making families, for example. The families they had in China or being a member of communities where they lived with others had irreplaceable values for them. But, of course, we are not allowed to forget that they could have lived in other ways of lives if they had not been forcibly mobilized to MSSJ during WWII. To imagine the real live they are living and the possibility of another live they could have had is giving us a hint concerning how to keep them in our memories. 

 손상의 이미지는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내 사진 작업에 등장하는 생존자들에게도 여전히 일상의 삶이 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그들에게 중국에서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는 없었습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라는 용어가 정의하듯이 타국 땅에 (강제)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가족을 이루거나 그 지역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 등등의 또 다른 일상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중국에서 이룬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점은 그들에게 대체할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로 강제동원되지 않았더라면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삶과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할 방법에 대한 힌트를 줍니다. 


 6. This exhibition shows the daily life of the elderly who were comfort women, but on the other hand, your photos reflect your life and journey that you have devoted to this work for a long time. I hope the exhibition can coincidentally reveal these two aspects. What are/were the challenges of working with photography for you as a recorder? And what are/were the most satisfying experiences? 저는 이번 전시가 위안부할머니의 일상을 다루지만 한편으로는 이 일에 오랫동안 헌신한 선생님의 삶과 여정을 되비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이 일치해서 전시에 드러나야만 한다고 봅니다.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위안부를 알리는 사진 작업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가장 만족스러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Meeting about 50 to 60 survivors in Korea, Taiwan and China and photographing them, I learnt that each survivor had self-story which only she can tell. In other words, we need to learn difference of individual memories and collective memories. It seems when we talk about or discuss the MSSJ we are mostly affected by the collective memories shared among us which was established by media reports and support movements. But on the other hands it is also important to listening to voices of each survivor based on the individual memories. I accept limited amount of information which a photograph can deliver to viewers, but I never stop hoping my photographic works play a roll of a bridge to connect subjects and our civil society. 

 한국, 대만, 중국 등지에서 50~60명 정도의 생존자들을 만나 사진을 찍다 보니 나는 그들 각자에게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의 차이를 학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MSSJ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토론할 때 우리는 우리 사이에 공유된 집단적 기억에 대부분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집단적 기억은 언론 보도와 활동을 지원하는 일에 의해 확립됩니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각 생존자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중요합니다. 나는 사진이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내 사진 작업이 그 대상들과 우리 시민 사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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